나의 이야기

나의 문학관(22회) - 전찬구 수필가 편(월간 문학세계 2016년 8월호. p38-p67)

전찬구 2016. 8. 11. 21:42

나의 문학관(22회) - 전찬구 수필가 편(월간 문학세계 2016년 8월호. p38-p67)


<전찬구 수필가 연보>





 ▶ 살아온 길

- 경북 칠곡 출생

- 약목초등학교 졸업(1964~1970)

- 약목중학교 졸업(1970~1973)

-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1973~1976)

- 경북대학교 경제학과 졸업(1976~1980)

- 공군부대 근무, 병장 제대(1982~1984)

- 한국수자원공사 공채 입사(1985) - 기획관리과장, 회계과장, 회계부장, 수도경영부장, 강원관리처장,  수도권관리처장, 정보관리처장 등 역임

- 한국수자원공사 상임이사(관리본부장) 역임(2012~2013)

- 칠곡엔바이로(주) 대표이사(2013년 12월~현재)


▶ 기타

- 국무총리 표창 수상

- ‘약목초등학교 모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2014년 8월)

- 월간  『문학세계』 수필 부문 등단(2015년 5월)

- 아내 허성애 『문예와 비평』 시인으로 등단(2005년)

- 아내 허성애 시집 『새벽에 우는 산까치』 발간(2007년)


== 글로 더 행복한 세상 ==


  월간 『문학세계』로부터 <나의 문학관> 원고 청탁을 받고서 아찔한 느낌이 들어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책 한 권 펴낸 경험도 없는 초보 문인으로서 인지도 높은 월간 『문학세계』 지면을 오염시키지나 않을까 걱정되어서였죠. 다른 한편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어 결국은 수용하고 말았습니다. 

  미흡하나마 나의 생각을 정성껏 정리해서 선보이게 되면, 그간 전문가로부터 평가받아보지 못한 내 글에 대해 기라성 같은 훌륭한 문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문단의 선배 제현께서 이 글을 관심 있게 읽어주시길 기대해봅니다.  그분들이 내 생각의 잘못된 부분과 내 글의 부족한 점을 짚어주고 애정 어린 지도 편달을 해준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1. 시골 소년의 꿈  


  경북 칠곡군 약목면 무림리 761번지. 깊은 산골 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고송 나뭇가지에 줄줄이 솔방울이 매달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한여름이면 뭉게구름이 온갖 모양의 자태를 보여주던 내 고향이다. 공부는 학교에서나 하는 것이고 방과 후나 방학 때는 소 풀 뜯으러 다니고, 지게 지고 십 리 길 깊은 산중으로 나무하러 다니던 곳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무작정 공부하기를 무척 좋아하던 내가 밤이 되어서야 호롱불 밑에서 모기에 뜯기면서 새벽까지 책과 씨름하던 시골 동네다.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시절, 여름 한낮에 가족들은 나한테 집 잘 보라고 당부하고 들에 일하러 나갔다. 혼자 있어 무료할 때는 늘 그래왔듯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라고 대청마루에서 중얼거리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던 중이었다. 꿈결에서 어디선가 목탁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은은한 퉁소 연주 소리가 이어졌다.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새하얀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대문 앞 큰 감나무 그늘 아래에서 삿갓을 눌러 쓴 스님 한 분이 퉁소를 불고 있었다. 광으로 가서 쌀을 한 바가지 수북 담아서 스님의 봇짐에 부어드렸다. 


  들일 마치고 돌아와서 저녁밥 준비하러 광으로 들어가신 어머니께서 놀란 목소리로 외치면서 뛰어나오셨다.  “큰일 났다. 쌀 도둑맞았다. 찬구야, 집 잘 보라고 했더니만 뭐 하고 있었노?”  양식이 귀했던 그 시절 스님에게 시주하는 양은 쌀 반 줌 정도면 족했는데, 눈에 띌 정도로 움푹 내려간 쌀독을 보신 어머니께서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스님이 퉁소를 불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좋은 일했으니까 아깝게 생각하지 말자. 그만큼 복으로 돌아오겠지!”의외로 어머니의 태도가 금방 바뀌었다. 그때부터 퉁소에 관심을 가졌고,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갔을 때 진주 촉석루 관광기념품 가게에서 당시 오십 원으로 퉁소를 사서 퉁소와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퉁소를 불고 나면 시조나 시 한 수 흥얼거리고 마무리하는 습관이 생겨 문학에 대한 애정을 배가시키는 도구로서 내 인생행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40년 전 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6년 여름,  예의 그 시골집 재래식 화장실에서 「선경에서 살리라」라는 제목의 중학교 때 쓴 일기장 한 권이 몇 장 찢겨 나간 상태로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보물을 발견한 듯 화들짝 놀라, 다리에 쥐가 나도록 오랫동안 화장실에서 그 내용을 읽다가 “화장실에 빠졌나, 뭐하고 있노?”라는 할머니의 음성을 듣고서야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린 적이 있다. 


  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적어내라고 했다. 가난한 농촌의 대다수의 아이들은 판검사, 의사, 국회의원, 대통령, 과학자, 은행장 등으로 적어냈는데 나는 문학가가 되겠다고 적어내고 집에 가서 그 얘기를 하다가 어르신들한테서 혼났다. “쓸데없는 생각 말거라. 문학가는 밥 먹고살기 어려운데, 힘들게 공부시키면 열심히 공부해서 권력을 쥐거나 돈을 벌 생각을 해야지….” 하셨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살림살이가 어려운 가운데도 자식에게는 공부를 시켜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학교에 보냈던 어른들에겐 다들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여하튼 나는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특별활동반은 항상 글짓기반을 선택했고, 운율에 매료되어 웬만한 고시조는 거의 다 외웠다. 십여 리 등하굣길에서 노래 부르듯 큰 소리로 시조를 읊으면서 다니곤 했고 글 쓰는 걸 무척 좋아했었다.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그 일기장에도 군데군데 치기 어린 자작시가 눈에 띈다.

1972년 중학교 3학년 때의 작품을 소개한다.


 


서로가 맞부딪쳐 온 하늘에 흩어지니

은하수 깊은 물이 보석을 다 녹인다

이 몸은 은하수 되어 넓고 깊게 살리라  


  정치권의 치열한 다툼 내용의 보도를 라디오를 통해 듣다가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지은 자작 시조다.


구름 타고 미끄러지는 달

물속에서 춤을 추는 달

버들가지에 걸려 몸이 찢어진 달

상쾌하고, 즐겁고, 괴롭던 시절이었건만

냇물이 흐르더니 세월도 함께 흘러갔구나   


  조숙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별명이 애늙은이로 알려질 만큼 생각이 많았던 한편, 지는 낙엽만 봐도 뭔지 모를 감성을 주체하지 못해 눈시울을 적시던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달래던 시다. 


2. 나의 별명은 ‘약목’  


  약목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로 유학을 갔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원서를 낼 때 가족들은 대구상고로 가라고 권유했다. 나중에 은행원이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청운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인문계로 가서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북사대부고에 들어갔다.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생 때부터 자취도 하며 가정교사도 하고 때로는 열차 통학도 했다. 집에서 약목역까지 30분, 약목역에서 대구역까지 한 시간, 대구역에서 학교까지 30분 걸렸으니까 하루에 왕복 네 시간을 길거리에서 소모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몸도 지쳤다. 주말이면 들에 나가 농사일도 도와야 했다.   


  친구들이 불러준 별명은 ‘약목’이었다. 내가 자란 시골 약목에 대해 주변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자랑하고 다녔던 게 제일 큰 이유인 것 같고, 지명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시골을 연상케 하고 내 생각과 행동이 늘 시골스럽게 비쳤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어떤 의미로 그렇게 불렀든 상관없다. 예나 지금이나 촌놈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촌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이후 수자원공사에 입사해서 퇴임할 때까지도 똑같은 맘과 행동을 유지했기 때문에 타 지역 출신은 잘 모르는 약목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내 주변의 동료, 선후배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3. 낭만의 천국 복현 캠퍼스  



  경북대학교 경상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 입학 원서 낼 때도 여전히 국문학과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어린 시절 집안 어른들이 문학은 돈이 안 된다고 만류했던 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대학원까지 6년 동안 원래 공부 그 자체가 체질에 맞아 학업에도 열중하는 한편 주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내 마음 가는 대로 낭만의 행각을 마음껏 즐겼다. 백고무신 신고 퉁소 불면서 캠퍼스를 나의 천국인 양 누볐다. <방랑 시인 김삿갓>을 부르면서 교내 아스팔트 길을 하염없이 거닐기도 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중앙도서관 앞 벤치에 혼자 앉아 김소월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즐겨 읊조리곤 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 따라 그 계절에 어울리는 시조를 목청껏 낭송하면서 다녔다.   


  방학 기간에는 금오산 굴암사에서 스님의 목탁 소리 들으면서 꿈같은 세월을 보내기도 했고, 팔공산 자락 동화사 아래 도학동 계곡의 고시촌에 머물며 공부했는데, 먼 산에서 소쩍새 한 마리가 새벽까지 토해내던 은은한 가락이 지금까지도 귀에 쟁쟁하게 울려오는 듯하다.  


  대구 시내 막걸리집도 나의 천국이었다. 시내 중심가에 대학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쪽샘’이라는 막걸리집이 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그날도 손님이 꽉 찼는데, 구석 자리에 앉아 퉁소를 꺼내 은은한 곡조로 한 곡 불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더니 연주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앵콜 소리가 터져 나오던 중이었다. 주인이 막걸리 한 주전자와 안주를 가져와서 내 앞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주문 안 했는데요?”  

  “무료 서비스입니다. 자주 방문만 해주세요!”  

  요즘과 달리 당시만 해도 취업이 잘 되던 시절이라 그렇게 생활하면서 장래 걱정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생활이 궁핍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생도 했지만 마음이 풍요로운 참 좋은 세월이었다. 


4. 한국수자원공사와 좋은 인연을 맺다          


  남들보다 늦게 군대에 입대하여 1984년 6월 말 공군 병장으로 제대한 후에 취업 준비를 시작했는데 친구들이 공기업에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당시 메이저급 공기업은 입사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나에겐 너무 부담스러웠다. 당장 먹고사는 게 시급하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더니만 친구 두 명이 합격할 때까지 굶어죽지는 않게 해주겠다면서 생활비의 일부를 지원해주었고, 그 해 가을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하여 1985년 1월 한국수자원공사(당시 산업기지개발공사)에 입사했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문학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겨 틈틈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끔 재미 삼아 사내 게시판에 생활 주변 상황을 소재로 짤막한 글들을 올렸는데 직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매년 직원 가족 독후감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2년 연속 대상을 차지하고 그 이듬해에도 작품을 제출하려고 하자 독후감 대회 담당 직원이 다른 사람한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하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농담을 했다. 그 직원과 같이 한바탕 웃고는 그 후로 독후감 대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공기업인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일도 열심히 했는데, 직장 생활 기간 내내 정권 바뀔 때마다 언론을 통해 공기업이 철밥통으로 매도되어 참으로 억울했다. 일이 많아 별 보기 운동을 밥 먹듯 했고 새벽까지 야근하고 지친 몸을 끌고 나갔다가 이튿날 아침 일찍 출근하던 경우도 셀 수 없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타고난 성격이 느긋한 데다가 동료들과의 지나친 경쟁이 체질에 맞지 않아서였는지 과장, 부장, 처장까지 승진해가는 과정에 한 번도 동기들 중에 선두로 나아가지 못하고 중간 정도로만 따라갔다. 그래도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해외와 북한 지역 등을 두루 다니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말년 운이 좋아 최상위 다섯 자리에 해당하는 상임이사가 되어 임원으로서 대한민국 물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임원으로 재임하는 동안 당시 국가적으로 최대의 이슈였던 사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여 마음 아팠다. 그 가치는 세월이 좀 더 흘러야 공정하게 평가받게 되겠지만, 현시점에서는 사람의 접근이 어려웠던 강가에 이젠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고,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룬 자연을 벗 삼아 글쓰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다시 30년 전으로 돌아가서 직장을 선택하라고 하면 이번에도 나는 수자원공사를 택하고 싶다. 좋은 직장으로 오래오래 내 기억에 남아 있을 것으로 본다. 


5. 아내가 시인으로 등단하다  


아내는 가정학을 전공했지만 평소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아내가 글을 쓰면 항상 나에게 보여주고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주문했다. 약목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이희승, 최현배 공저 문법책을 구해주셔서 300여 페이지나 되는 그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깡그리 외웠던 덕분에 맞춤법에는 자신이 있었다. 신혼 초기에는 내가 한 수준 위라고 으스대면서 띄어쓰기를 포함해서 맞춤법, 문맥이 어색한 부분에 대해 가끔 지도교사인 양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그랬던 아내가 방송대 국문과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해 깊이 공부를 한 후 어느 순간 청출어람 해버렸다. 꾸준히 문학에 관심을 보이던 아내는 2005년 시인으로 등단하고 2007년 시집 『새벽에 우는 산까치』를 발간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주어서 나에게도 더없이 기쁜 결실이었다.  



  장모님께서 우리 집에서 하룻밤 지낸 적이 있다. 작은 아파트라 큰 방은 모녀가 차지하고 나는 거실에서 자다가 두런두런 얘기 소리에 새벽에 잠시 깨어나 엿들었다.

  “엄마, 나는 전 서방과 함께하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이겨보지 못하고 살아왔어.”

  “얘야, 나도 네 아버지랑 평생 그렇게 살았단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의견 충돌이 있을 때 ‘남자가 참아야 집안이 평안하지’ 하는 맘으로 항상 아내에게 져주면서 살아온 덕분에 30년 동안 같이 살면서 냉전 상태가 24시간 이상 지속된 경우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아이가 문과·이과를 결정하거나 대학을 선택할 때, 부동산을 사고팔 때, 이사 가는 집을 선정할 때 등 몇몇 중요한 방향을 정할 때는, 물론 아내의 의견을 묻는 과정은 거쳤지만 항상 내가 결정하면 아내는 거의 예외 없이 그냥 따라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나마 모녀간의 대화 내용 중에 ‘제대로’라는 단서를 붙인 상태에서 이겨보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했으니까 이 또한 내가 따지고 싸울 거리는 아니다.  


  이렇듯 친정어머니와 같은 길을 밟고 살아온 아내 허성애 시인의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매화나무 아래서


 

지난가을 찬바람에

애지중지 키우던 잎사귀

하나둘 모질게 떠나보내고

눈물로 이어온 삶


칼날 같은 겨울바람에

물 빨아올리던

젖줄기 등줄기 모두 휘어지고

살 긁히면서도

기도하며 이겨낸 겨울 끝자락


찬바람 후리고

늦눈발 디밀고 간 자국

작은 가슴 위에 하얗게 남아 있는데

시린 손끝으로 매화꽃 피웠다

부드러운 속살 열었다.


전설로 내려오는 매화 한 송이가

어머니께 못다 한 사랑

뒤늦은 후회 일깨우듯

하얀 눈물로 그윽한 향기 만들었다.


눈물꽃 향기 가득한 매화나무 아래

어머니를 꼭 닮은 내가

어머니의 길을 밟으며 간다.   


6. 수필가로 등단하다   


  2013년 말 29년간의 한국수자원공사 근무를 마감하고 계열사 칠곡엔바이로(주) 대표이사로 취임하자 시간적인 여유가 좀 생겨 본격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유년부터 간절히 그리던 꿈을 이루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컴퓨터 문화의 발전으로 내 체험을 담은 글을 많은 사람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등단을 목적으로 시도한 건 아니지만 각종 카페, 밴드, 페이스북에 취미 삼아 글 올리기를 즐겼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내용, 감동적인 얘기들을 어디선가 따온 상태로 글을 올리지만 나는 언제나 내 생활 주변의 경험을 소재로 창작한 글만을 올렸다. SNS와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이동 중에도 글을 올릴 수 있어 이러한 취미 활동을 하기에 참 편리한 세상이다. 내가 글을 올릴 때면 여러 동료들이 ‘등단해도 되겠다’는 댓글을 달아주곤 했고 그것이 등단하겠다고 마음을 굳히는 데 상당 부분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SNS에 올렸던 내용 중 일부를 수필의 소재로 삼아 2015년 5월 월간 『문학세계』에 세 편의 작품을 제출해서 그중 「고독한 젊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되어 수필가로 등단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7. 수필에 대한 나의 생각


◈ 수필은 참으로 어려운 장르이다.  


  수필가로 등단한 후부터는 작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좋은 글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런데, 종전과 달리 수필가라는 간판을 달고 문인의 자격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큰 난관에 부딪쳐버렸다. 수필은 ‘일상생활 속에서 얻은 체험, 생각과 느낌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자유롭게 쓰는 글’이 아니라 ‘결코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쓰는 글’일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체험을 단순히 무미건조한 글로 나열하기보다는 가급적 잔잔한 감동이라는 양념을 부가해야만 의미 있는 수필이고 그래야만 읽힐 만한 가치 있는 글로서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는 게 내 소신이다. 맛을 돋우는 양념이 적당한 곳에 적절한 양만큼 투입되어야 하는데 그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인간은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이웃 등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숱한 비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나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수필에 등장하는 상대 인물에 대해 언급하기가 부담스러운 경우도 허다하다. 수필을 통해서 당사자가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개인 정보를 노출하거나 명예훼손을 초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점 때문에 체험의 핵심적인 부분을 글 내용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제약으로 인하여 당초 의도했던 방향에서 벗어나게 되면 무의미한 신변잡기성 글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다. 모처럼 찾은 훌륭한 소재를 작품화시키지 못하고 급기야는 진정 가치 있는 글로 꽃피울 기회를 통째로 놓치고 만다. 그렇다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게 되면 그건 수필의 범주를 벗어날 수밖에 없으며, 진솔하게 벗지 못하고 핵심을 숨기거나 우회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게 되면 그 글은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책이 초보 문인인 나에게 가장 큰 과제로 남아 있다.


◈ 글로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  


  글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인간 생활에 유익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두운 구석, 슬픈 사연, 왜곡된 사회현상 등의 내용은 내 글에서 배제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쓴 글을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고 싶다. 자연의 아름다운 전경,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재미있고 감동스러운 내용들을 주제로 삼음으로써 그러한 글들을 쓰는 동안 우선 나 자신부터 행복해지고 내 글을 읽는 독자들과도 그 행복을 공유하고 싶다. 


  아내 허성애 시인과 함께 시에 수필에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담아 널리 전하고 다 함께 행복을 느끼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


 

8. 나의 수필 소재 관리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기간 내내 놀다가 개학을 하루 앞두고 방학숙제 덜 했다면서 칭얼거리자 아내가 도와주기로 하고 아이랑 아내가 둘이서 밤늦게까지 끙끙대었다. 내가 먼저 잠들었다가 자정 무렵에 깨어서 동정을 살펴본즉 아내는 눈을 비벼가면서 아이 대신 방학숙제 해주느라 여념이 없고 그 옆에 어느새 새근새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애틋한 맘으로 나도 거들어줘서 숙제를 겨우 마무리했다.   


  글 소재는 평소에 축적되어야 한다고 본다.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할 원고를 청탁 받은 사람들은 마감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피 말리는 과정이라고들 한다. 수필은 생활 곳곳의 경험에 따른 영감을 단순히 메모 수준이 아니라 짧게라도 글의 모습을 갖춘 상태로 정리해두었다가 시간을 두고 작품화시키는 과정을 거쳐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작성하다 보면 좀 더 신경 쓰게 되고 정성이 가미되기 때문에 보다 짜임새 있게 정리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순간순간의 체험을 즉시 짧은 글로 다듬어 SNS에 올리곤 한다. 그렇게 내가 올렸던 글 몇 편을 소개한다. 오래전부터 수필집 몇 권 펴낼 정도의 글 소재를 이런 방식으로 축적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배울 게 더 많은 삶>


  장남 결혼 준비 과정에 처음이라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특히 ‘예의 갖추기’와 ‘부담 안 주기’라는 상반된 가치관의 선상에서 청첩장 전달 대상 선정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객지 생활 30년 만에 그간 경조사에 별로 참석하지 못 했던 시골 동창과 일가친척이 모여 사는 고향 지역으로 돌아와 근무하다 보니까 결혼 소식 알리기에 애매한 상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고향 분의 경우는 청첩장도 못 받았는데 예식장에 나타나도 될는지 모르겠다면서 나한테 많이 서운해하더라는 얘기도 간간이 들려왔다.   


  학창시절 나에게 유난히도 잘 대해주던 14촌 형님 내외분이 계셨는데 형님은 20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형수님이 조카, 손자들과 농촌에 계신다. 


  청첩장을 전하게 되면 혹시 부담 주게 될까 봐 많이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성주 선석사 인근 산골에 있는 전씨 집성촌으로 찾아가서 종중 선산에 잠깐 들렀다가 형수님 댁을 방문했다. 오만 원짜리 몇 장 넣은 용돈 봉투를 조심스럽게 내밀면서 청첩장도 함께 드렸다.  

  “형수님, 객지 생활하느라 자주 방문하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 저의 장남 결혼식에 형수님을 꼭 모시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짧게 옛날 얘기 나누고 나와서 승용차를 타고 천천히 출발했다.  “모처럼 왔는데 좀 더 놀다 가면 좋으련만!” 하면서 팔순 노인 형수님은 골목까지 따라 나와 구부러진 허리를 힘겹게 편 채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손을 흔드셨다.  


  주름진 두 뺨에 흘러내려 봄 햇살에 비치는 영롱한 눈물을 보는 순간 그래도 와 보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세월 무상에 잔잔하게 가슴 떨리는 하루였다.


<돌아오지 않는 계절>


  추석을 며칠 앞두고 저녁노을에 비치는 산 빛이 심상찮다. 머지않아 낙엽이 지고 또 한 해가 지나가려나 보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보고 싶은 사람,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의 여유로운 만남의 기회를 놓친 채 덧없이 세월이 흘러간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엄습한다.  


  수자원공사 직장 후배한테서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선배님, 여전히 바쁘게 살고 계시죠? 시간 한번 내주세요. 찾아뵙고 싶습니다.”  

  “퇴직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연락 줘서 고맙네! 언제 날 잡아서 소주 한잔 하세!”  

  전화를 끊자마자 ‘아차, 또 실수했구나! 날짜를 정해서 만나자고 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뒤따랐다.  현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치열하게 전쟁 치르듯 생활하고 있지도 않은데 뭐가 그리 바빠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후배에게 겉치레 인사말로 응대하고 말았을까?   살아가노라면 별 이유도 없이 습관적으로 시간에 쫓겨 소중한 만남이 미뤄지는 경향이 있다. 



  안부 인사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언제 한번 봅시다.”  

  “이번 달 중에 저녁 식사 한번 하시죠?”  

  “혹시 가능하다면 10월 5일 같이 저녁 식사 한번 하고 싶은데요.”  

  대답도 제각각이다.  

  “그럽시다. 언제 한번 보도록 하죠.”  

  “다음에 다시 연락해서 이 달이 가기 전에 날 잡아서 한번 봅시다.”  

  “그날은 선약 있습니다. 10월 7일은 어떨까요?”  


  코스모스의 자태가 한창 무르익어간다. 저 환한 모습이 시들기 전에, 찬바람에 부대끼어 헐벗은 초라한 표정으로 바뀌기 전에 그리 바쁘지도 않은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 소중한 만남을 실천에 옮기는 여유가 필요한 계절이다.


<참 애매한 세대>


  경북 칠곡군 약목면 무림 2리 고향 후배들이 주최한 경로 효도 잔치에 참석했다. 한 건배씩 나눈 후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안내했다.  

  “자녀들이 어르신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올리는 순서입니다.”  

  나도 절 올리는 대열에 합류해서 준비하던 중에 사회자가 지적했다.  

  “전찬구 큰 형님은 절 받는 자리로 옮겨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많이 서운한 맘으로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반론을 제기했다.  

  “저는 아직 회갑이라도 되려면 일 년이나 남았습니다. 절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절을 하는 자리가 합당합니다.”  억지떼를 써서 후배들과 함께 어울려 어르신들께 절을 올렸다.  


  47년 전에 떠나신 어머니, 33년 전에 떠나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웃 어르신들께 경건한 자세로 인사드렸다. 고향 마을 후배들이 허락해준다면 향후 20년 동안만이라도 절을 하는 대열에 끼고 싶은데….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녹음이 한껏 젊음을 뽐내는 고향의  마을 잔치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들>


  밀크커피 한 잔 먹으려고 왜관역 자판기 앞에 섰다. 300원짜리, 400원짜리가 있다. 흔히 그래왔듯이 잠시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100원 더 투자하지 뭐’ 하면서 평소와 달리 과감하게 400원짜리를 빼먹었다.  


  대학 시절 6년 동안 백고무신 신고 5천 원짜리 퉁소 불고 다니면서, 장차 취직하면 제일 먼저 비싼 퉁소부터 하나 구하리라는 큰 꿈을 가졌었다. 1985년 수자원공사에 입사한 후에 바로 실행하지 못하고, 20만 원짜리 고급 퉁소 하나 사게 된 건 그로부터 24년이 더 지난 2009년도였다.  


  평소 입버릇처럼 ‘백화점에 가서 고급 골프웨어 하나 사야지’ 하면서도, 아내와 함께 상설 할인 매장에 가서 30만 원짜리 옷을 90퍼센트 세일할 때 3만 원에 건지고 나와서는 ‘오늘 운 좋아 27만 원 벌었다’라고 중얼거리면서 같이 즐거워한다.  


  재벌 2세는 수십만 원짜리 고급 음식에 양주 마셔야 체면이 서지만, 맨손으로 출발해서 사업을 키웠던 재벌 회장은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마시면서도 행복하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의 경제 사정과 관계없이 비싼 장난감 가지고 놀거나 돈 들여 게임을 해야 즐거운데, 나는 초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뒷산에 넘어져 있는 대나무 하나 줍고 창호지 한 장 사서 직접 연을 만들어 허허들판에서 날리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겁다.  


 

  비탈진 가을 계곡의 물처럼 세월은 빨리도 흐르건만 내 마음은 석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아담한 농촌 저수지의 물처럼 정지해 있다.


 

<김삿갓 마곡사 방랑기>


  석양의 황홀한 빛살이 온 산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시각이다. 

  마곡사 백범명상길을 거닐다가 호젓한 곳에서 도화(桃花) 잎을 깔고 앉은 채 계곡물을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금산 금수(金山 金水)로다!”

  봄바람 타고 홀연히 나타난 김삿갓이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을 건넸다.  

  “여보게, 젊은이! 무얼 그리 혼자서 중얼거리는가?”  

  “황진이한테서 배운 단어 몇 개 흉내 내면서 시인이랍시고 주유천하 했던 삿갓 영감님을 나 전삿갓이 흉보고 있던 중이라오.”  

  “황진이 흉내라니, 무슨…?”  

  “영감님은 산과 물의 빛깔을 유심히 살펴보지도 않은 채, 황진이가 즐겨 써먹던 단어 靑山(푸른 산), 綠水(푸른 물)를 아무런 생각 없이 남발했소이다. 이를테면, ‘나는 청산으로 들어가는데 녹수야 너는 나와서 어디로 흘러가느냐’ 등등….”  

  “자네 눈에는 산과 물이 푸른빛으로 보이지 않나?”  

  “내 눈에 비치는 산수는 금산 금수(金山 金水)라오. 다시 잘 보시오. 초봄의 산은 황금빛이요, 물속에 잠기어 출렁이는 산경도 황금빛이라….”  


  옆구리가 허전하여 눈을 돌리는데 어느새 삿갓 영감은 석양의 빛줄기를 가르면서 숲 속으로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지팡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영감님의 뒷모습을 보고 ‘젊은이가 너무 버릇없이 굴었구나’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다. 


  9. 자연과 함께 아내와 함께 문학을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 없고 시간적 여유도 있어 평온한 맘으로 글쓰기 좋은 여건이다. 바로 옆에 낙동강물이 흐르는 근무지에서 강바람 산바람과 친구 되어 글 쓰는 생활을 즐기고 있다.   

  주말에는 대전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함께 인근 지역의 산을 자주 찾는다. 동네 바로 뒤편에 계족산이 바라보이고 가까운 곳에 계룡산, 속리산, 대둔산, 식장산, 마이산이 있다. 준비물은 물 한 병, 김밥 두 줄, 퉁소 하나면 족하다.   

  산을 오르내릴 때는 번갈아 시 낭독을 한다. 계족산을 오를 때는 그 산을 배경으로 아내가 지은 시 「가을 산」을 읊는다. 


가을 산


 

저벅저벅

비에 젖은 나뭇잎을 밟는다


토독토독 

물을 튀기는 산국화


오가는 사람 없는 산길

산까치 두 마리가 오르락내리락


비에 젖은 숲은

머리 깎은 비구니의 춤사위


긴 소매 한 번 펼쳐 휘두를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속세의 인연


  아내가 쓴 글은 내가 봐주고, 내가 쓴 글은 아내가 봐주는 그런 과정이 즐겁다. 더군다나 문단 입문 선배인 아내는 나와 결혼한 이후 줄잡아도 2천 권 이상의 책을 읽은 고수니까 내가 배울 게 더 많아서 좋다. 머지않아 부부 문필가로서 시와 수필이 어우러진 훌륭한 작품집을 내고 싶다.   


  등단 후로는 주위로부터 가끔 언제 책을 발간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아직은 시간을 두고 다듬고 다듬어서 잘 익은 작품이라고 나 자신이 판단했을 때 발간할 생각이다. 물 샐 틈 없는 수준이 아니라 공기 샐 틈 없을 만큼 완숙한 상태에서 작품집을 펴내고 싶다. 

  혹자는 책을 자주 내서 평가받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게 옳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만 나에겐 아직은 아니라고 본다.  


  나의 등단 작품 「고독한 젊은이」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마음은 여전히 젊고 또 백 세까지 그렇게 젊은이로 남고 싶은데 어느덧 내년이면 황혼의 상징인 회갑을 맞이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만 글에 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누군들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겠는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학비 마련이 힘들어 더러는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고 인생 역로에 스쳐 갔던, 다시는 떠올리기 싫을 만큼 고난의 순간도 무수히 경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누구보다 눈물도 많이 흘렸던 지난 세월을 회고하면서 요즘 혼자 있을 때는 <살아 있는 가로수>를 즐겨 부른다.  


찬 바람 부는 날도 비 오는 날도

허리띠 졸라매고 말고삐 잡고

땀방울에 눈물 적신 인생의 역로

지금은 황혼 길을 가고 있지만

살아 있는 가로수엔 봄이 오네 꽃이 피네


가슴이 무너지던 슬픈 역사도

술 취해 울던 때도 옛날이야기

바람 부는 네거리에 낙엽과 같이

이제는 석양 길에 홀로 섰지만

살아 있는 가로수엔 봄이 오네 꽃이 피네  



[전찬구 수필가 대표 작품]


 

 

((꽃망울))
 

꽃망울 맺혔네

꽃이 피려고 하네


겨울바람 두 뺨을 스칠 땐

가슴 깊숙이 시린 적도 있었지


가는 빗줄기에 옷자락 젖을 땐

엄마 품이 그리웠었지


차가운 달빛이 머리카락 쓰다듬을 땐

수줍어 움츠렸었지


언제 나에게 봄이 오려나

기다림에 지쳐 몸서리친 날도 있었지


꽃망울 맺혔네

꽃이 피려고 하네




((이슬비 방울))


사무실에 좀 늦게 나왔더니 직원이 핸드폰 번호가 적힌 쪽지를 내밀고 이상한 할머니한테서 사무실로 전화 왔다면서 통화 내용을 얘기했다.

  “전찬구 씨 있습니까?”

  “외출 중이신데요.” 

  “그러면 핸드폰 번호라도 좀 알려 주이소.”

  “신원이 불확실하면 알려드리기 곤란한데요.”

  “나, 대구 할머니인데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어서… 가르쳐주기 싫으면 관두소! 사무실 번호도 알아냈는데 까짓것 인터넷으로 알아보면 되지 뭐. 딸깍."


  전화를 걸어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는 급히 칠곡경북대학교병원으로 가봤더니 최근까지 건강하셨다던 그 할머니는 오늘 갑자기 담도암 판정을 받고 병실에 누워계셨다.

  “아이구, 왔구나! 니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데이.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봤는데 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라서 급하게 전화했던 기라. 사는 게 왜 그리 바쁘노?” 눈물을 글썽이면서 내 양손을 꼭 잡으셨다.


  할머니 모습으로 변해버린 아주머니의 야윈 얼굴을 보는 순간, 군 복무를 마치고 와서 취직시험 준비를 하던 1984년 가을이 생각났다. 

  약목 시골집에서 공부하기엔 주변 환경이 열악했고 대구에 거주하기엔 경제적 여건이 안 되었던 터에, 입대 전 입주 가정교사로 있던 대구 신암동 집에서 주인아주머니의 배려로 수개월간 가족처럼 함께 살게 되었다. 옛정을 생각해서 엄마 같은 정성으로 뒷바라지해주신 아주머니 덕분에 가까운 경북대 도서관에서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해 10월 어느 날, 그때만 해도 전화기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 집 전화기를 빌려서 산업기지개발공사(현 한국수자원공사) 인사과에 전화를 했다.

  “수험번호 ○○○번 전찬구인데요?”

  “합격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통화 내용을 듣고 계시던 아주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뒷전에서 들려왔다.

  “참 잘 됐구나! 엄마 없이 공부하면서 대학교 다닐 때도 양복 한 번 못 사 입어보고 고생했는데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줘서 너무 고맙다. 양복 한 벌 맞추러 가자!”

  당시 13만 5천 원 거금을 투자해서 나에게 평생 처음 양복을 입혀주셨고, 그 이듬해엔 중매까지 서주신 분이다.


  돌이켜보면, 아주머니의 보살핌 덕분에 정작 나에겐 대학 시절이 고생스럽기보다 아름다운 추억의 세월이었다.


  당시 해산물 도매사업을 하고 계시던 그분은 싱싱하고 맛있고 비싼 해삼, 멍게를 자주 맛보게 해주셨고, 가정교사 수고비도 월정액을 책정하지 않고 책을 충분히 사볼 수 있도록 수시로 자식 용돈 주는 마음으로 풍족하게 주셨던 것이다. 양복 한 벌도 갖추지 못해 학교 페스티벌 때는 다른 사람한테 빌려서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저개발 국가였던 1970년대에 농촌 출신으로서 4년제 대학까지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기 전에 흰 고무신을 빨랫비누로 깨끗이 씻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잘 읽지도 않던 두꺼운 영어 원서 사무엘슨의 경제학 서적을 과시용으로 꼭 포함시켜 대학교재를 싼 보따리를 퉁소로 끼운 채 어깨에 걸치고 등교했다. 

  여름에는 허름한 밀짚모자를 쓰고 소풍 가듯이 캠퍼스에 나타나곤 했는데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고무신이 내 눈에는 차라리 사치스럽게 보였다.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졸리면 학교 중앙의 연못 일청담에서 달빛을 받으면서 퉁소를 불었다. “또 그 사람 나타났다”라고 키득거리면서 여대생들이 다가왔다. 같은 과 단짝 친구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그 친구는 오로지 한 여대생만, 그마저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동경만 하던 터였는데 내가 퉁소 부는 옆자리에 앉아 ‘고독 속에 파고드는 쓰라림도 알았노라’라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퉁소 소리 단골 고객 여대생만도 열댓 명이나 되는데 너는 인마, 고작 한 여대생에게만 일편단심이냐?”라고 놀리노라면 그 친구는 고소를 머금으면서 “까불지 마라, 다(多)는 곧 무(無)다. 많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 같은 거야.”라고 대꾸하곤 했었다.


  결혼 후에 중매쟁이한테 인사한다는 명분으로 아주머니를 한두 번 찾아뵌 후로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이후 30년 동안 해마다 여러 차례 ‘그 아주머니 언제 한번 꼭 찾아뵈어야지’ 다짐만 하고 행동에 옮기지 못한 지난 세월이 아릿하게 가슴을 짓누른다. 

  고급 양복 한 벌 값을 병원비에 보태라고 드리고 나와서 우산도 쓸 경황이 없는 채로 다시 병동 건물을 올려다보았다.지난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면 주위에 잘한 일보다 잘못한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오늘따라 봄비 맞은 벚꽃이 화사하게 보이기보다 애련하고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내 눈썹 위로 흩뿌려져 두 뺨을 적시는 이슬비 방울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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